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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끝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
by 정현구2023-05-16

현대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을 일상의 삶에서 격리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장례문화는 죽음을 눈앞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의 눈물 어린 눈길 가운데서 숨을 거두기보다, 병원 중환자실이나 특수병동의 낯선 공간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도회지는 무덤을 외곽으로 옮겨 놓고, 병원은 영안실을 잘 안 보이는 뒷부분에다 둡니다. 모든 공간을 가능한 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만으로 채색하려 합니다. 그래야 생명으로 충일한 생동하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삶은 죽음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도서 7:2).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잔칫집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망각하게 하지만, 초상집은 인생의 마지막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현재를 더욱 의미 있게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호스티스와 호스피스


‘호스티스’와 ‘호스피스’란 두 직종이 있습니다. 호스티스는 밤의 화려하고 달콤한 쾌락 속에 사람들을 취하게 해서 인생의 밤, 인생의 마지막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스피스는 투병하는 사람의 병상 곁에서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분명히 눈뜨게 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닫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 호스티스와 호스피스, 죽음의 망각과 죽음의 기억, 어떤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만들까요?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받을 때 먼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하나는 ‘당신은 당신의 묘비에 어떤 말이 쓰이기를 원하십니까?’이고, 또 하나는 ‘당신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두고 사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며 살게 하고, 현재 살아가는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고, 유언장을 미리 쓰게 합니다.


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의 책 ‘죽음, 알면 이긴다’(샘물)에는 그의 유언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 유언장에는 자신이 살면서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한 유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소유물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신체와의 관계에 대한 유언들입니다. 그 유언장의 일부입니다. 


저의 천국환송예배 때 이 글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 안식하기 위함이니 너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세상 고생을 다 끝내고 평안히 쉬고 있는 저를 생각하면서 기뻐해 주십시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방황하던 죄인을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고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며 살다가 저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하신 주님, 그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뵐 것을 생각하니 기쁨으로 벅찹니다. 주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제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 용서해주십시오.

둘째, 사랑하는 이들에게. 여보, 먼저 좋은 곳으로 가는 나를 용서해주오. ‘내 남편에게 휴식이 필요했는데 이제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쉬겠구나’ 생각하고 위로받기 바라오. 

셋째, 소유물에 대하여. 제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샘물호스피스복지재단을 만들어 귀속시켜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저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다가 떠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유서와 유언장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이렇게 유언장을 미리 쓰고 살면, 주어진 삶을 더 잘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삶을 삽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때늦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전체로 보게 됩니다. 살다 보면 현재에 파묻혀 인생을 길게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고 살아가면, 삶의 목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루하루를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늘 생각하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출생을 준비하고, 입학을 준비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취직을 준비하고, 노년을 준비합니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유서를 쓰지만,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유언장을 씁니다. 아름다운 끝을 마음에 담고서 매일을 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영생을 향한 새 출발임을 알기에 더욱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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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현구

정현구 목사는 부산대와 서울대학원 영문과를 거쳐 고신대신대원(신학)과 예일대와 밴드빌트 대학(기독교사상사)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영동교회 담임목사와 기윤실 공동대표, 희년선교회 이사장, 복음과도시 이사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광야에서 삶을 배우다, 다스림을 받아야 다스릴 수 있다 등이 있다.